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조한진 교수 인터뷰, 장애인 복지, '가족 단위'로 넓혀야

등록일 2026-05-14 작성자 장봉준 조회수 6

대구 수성구의 한 소아전문 재활의학과병원 심리치료실. 아빠는 검은색, 엄마는 빨간색, 발달지연 고위험군인 동생 민재(가명·5)는 초록색 천을 둘렀다. 참관하던 손수민 원장(손수민재활의학과의원)이 일곱 살 민준이(가명)의 아바타가 되어 파란색 천을 몸에 감았다. 사이코드라마 기법을 활용한 ‘가족 조각’ 치료 시간, 민준이는 자신의 분신인 손 원장의 손을 잡고 가족들의 위치를 정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민준이가 가장 좋아하는 아빠를 세운 곳은 자신의 옆이 아닌, 동생 민재의 바로 곁이었다. “왜 아빠를 저기 세웠니?” 치료사의 질문에 민준이는 담담하게 답했다. “저도 아빠를 좋아하지만 민재가 아빠를 더 좋아하고, 아빠는 민재만 보니까요. 저는 괜찮아요.”

아바타가 되어 민준이의 그림자 자리에 선 손 원장과 이를 지켜보던 치료사, 기자, 그리고 부모의 가슴은 먹먹한 통증으로 아려왔다. 투정 한 번 부릴 법한 나이건만, 일찍 철이 들어버린 ‘어른아이’의 덤덤한 양보는 무의식중에 홀로 감내해온 정서적 소외를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드러나지 않은 상처… 복지 사각지대 방치된 ‘비장애 형제’

장애나 중증 질환을 앓는 형제자매를 둔 가족 내 ‘비장애 형제’들이 텅 빈 복지 정책 속에서 심각한 정서적 위기를 겪고 있다. 한국장애인개발원이 수행한 ‘비장애 형제자매 실태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 비장애 형제는 하루 평균 2.51시간을 아픈 형제를 돌보는 데 쓰고 있었다. 문제는 이 핵심 데이터가 10년 전인 2014년 자료라는 점이다. 비장애 형제만을 단독으로 조명한 전국 단위 실태조사조차 찾아보기 힘들 만큼, 이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정책적 배려는 척박한 수준이다.

최근의 지역 단위 조사 결과는 더 충격적이다. 서울시장애인가족지원센터의 ‘성인기 비장애형제자매 사회정서 실태조사(2020)’에 따르면, 성인 비장애 형제자매의 구체적 자살 계획 비율은 16.0%로 일반 성인(2.8%)의 5.7배에 달했다. ‘내가 죽을 때까지 형제를 돌봐야 한다’는 미래 부양 압박감 지수 역시 3.09점(4점 만점)으로 극에 달해 있었다.

이날 치료를 진행한 이형진 양지드라마심리상담센터장은 “비장애 형제들은 아픈 형제에게 방해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가장 뒷자리에 배치하곤 한다”며 “어릴 때 쌓인 억울함을 표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면 성인이 된 후 가족과의 단절을 선택하는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경고했다.

◆부모의 번아웃과 끊기는 예산… 멍드는 아이들

이처럼 비장애 형제가 방치되는 현실을 단순히 부모의 개인적 수준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장애 자녀를 돌보는 부모들 역시 신체적, 정신적 한계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경기복지재단의 ‘최중증 발달장애인 24시간 돌봄 실태조사(2023)’에 따르면 주 돌봄자의 41.0%가 심각한 우울감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가 극심한 돌봄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건강한 자녀’에게 먼저 양보와 성숙을 기대하게 되는 구조적인 비극이 발생한다. 민준이 아버지 역시 “첫째가 어느 정도 컸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양보를 강요해왔던 것 같다”며 “아이의 진짜 속마음을 마주하고 나니 첫째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고개를 떨구었다.

붕괴 위기의 가정을 살려낼 공적 심리·정서 지원 인프라는 턱없이 부족하다. 지자체나 장애인가족지원센터 등에서 비장애 형제를 위한 캠프나 문화 체험을 간헐적으로 열고는 있지만, 대부분 단발성 행사에 그친다. 그마저도 예산이나 후원이 끊기면 하루아침에 사업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지속적이고 심층적인 치료는 온전히 가족의 사비나 일부 민간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다.

민준이 가족의 사이코드라마 치료비를 후원하고 있는 손수민 원장은 “현재 의료·복지 시스템은 철저히 아픈 아이 한 명에게만 집중되어 있어 비장애 형제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며 “이 아이들은 따뜻한 관심 한 번이면 사회의 소중한 자원이 될 수 있는데, 방치되어 훗날 가출이나 정신적 질환으로 이어지면 그 사회적 비용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인이 아닌 ‘가족 단위’ 복지로 패러다임 바꿔야

전문가들은 이제 시혜성 복지를 넘어 ‘가족 단위’의 통합적 복지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조한진 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부모가 아픈 아이에게 모든 에너지를 쏟는 환경 속에서 비장애 자녀는 정서적 방임을 겪기 쉽다”며 “복지 서비스의 단위를 개인이 아닌 가족 전체로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이어 “단발성 캠프를 넘어 미국의 ‘시브샵(Sibshops)’처럼 생애주기별 맞춤형 정서 지원이 상시 제공되어야 하며, 이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할 ‘장애인가족지원법’ 제정과 ‘가족 심리치료 바우처’ 신설이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당연시해 온 ‘안 아픈 아이들’. 민준이가 파란색 천을 두른 자신의 곁으로 아빠를 당당히 끌어당길 수 있게 하려면, 이제는 국가와 지역사회가 그 무거운 돌봄의 짐을 나누어 져야 할 때다.

 

기사 원문 : https://www.idaegu.com/news/articleView.html?idxno=661884